2010년 4월 12일 월요일

박지원 아버지·큰아버지 경찰에 사살 당해


[박지원x-파일] 광주학생운동 하다가 공산당 가담, 빨치산 활동까지..


‘친일파에서 남로당(공산당)으로 변신한 가문’ -- 박지원 씨의 집안 내력을 고발하는 ‘국민회의 박지원의 정체’ 유인물 첫장에 등장하는 제목이다. 이 유인물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 박지원의 부친 박종식(1910년생)은 1940~45년 까지 일본 통치 시절 일본인들에 의해 고향인 진도군 군내면과 고군면에서 목화 수매 책임자로 친일파 두목이었음.

◇ 1945년 해방 후 박종식은 남로당(공산당) 진도 지역 책임자가 되었고 숙부 박종국은 고군면 인민위원회 부 위원장이 되었음.

◇ 박종식 박종국은 1948년 10월 23일 경찰에 수배되어 도피중 진도 경찰서 김기일 곽순배 형사 등에 의해 총격전 끝에 사살됨.(1976년 2월 25일 진도군이 발행한 진도 군지(郡誌)에 기록되어 있으며 곽순배 형사의 친척이 되는 곽우불 진도 번영회 회장 증언)

◇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진도군에 북한 인민군이 진주했으며 이때 박지원의 삼촌, 고모 등이 북한 인민군 편에 나서 면민들을 가혹하게 북한 의용군에 징용되도록 만들어 주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그러다가 9.28 수복 후 북한이 패전 인민군이 도망가자 박지원의 삼촌 고모도 인민군과 함께 도주하다가 주민들에게 붙잡혀 돌과 몽둥이로 맞아 죽음.(진도군 무공 수훈자 회장 최기남씨 증언)

◇ 이런 모든 사실을 숨기기 위해 호적등 관계 서류를 파기, 변조하고 1992년 2월 20일자에 호적을 다시 만들어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발부 취득한 것으로 되어 있음.

한편 ‘박지원에 대한 재미 한인교포의 증언’ 유인물 3페이지 5번째 제목에는‘박지원 아버지(박종식)의 좌익(공산당)활동’이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으며 아래와 같은 스토리가 폭로되어 있다.

(가) 지방 유격대장으로 우리 경찰(한국 경찰)을 무수히 죽임.
(나) 지리산 피아골 함락 이후 목포 신안으로 피신, 마지막까지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름.
(다) 박종식은 DJ(김대중)와 목포상고 동문.
(라) 1993년 8.15 행사때 박종식은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포장을 받고 애국자로 둔갑함.(포장증. 제 1552호, 당시 총무처 장관 최창윤)
(마) 공산당과 빨치산 활동을 하며 무수한 시민들을 죽인 반역자가 갑자기 어느날 애국지사로 둔갑, 건국포장이라는 국민훈장을 받자 애국자 가족들과 단체들은 상당히 흥분했다. 그래서 한국논단 96년 3월호에서는 “사살된 공비에게도 건국포장을 수여하느냐?”라며 문민정부를 비판하는 특집기사가 발표됐다.

이 두가지 유민물에 의하면 박지원 씨의 아버지 박종식은 일본 총독부 시절 한국인을 괴롭히는 일본놈들의 앞잡이가 되어 군민들을 괴롭히다가 1945년 8.15 해방 후에는 형 박종국과 함께 공산당에 가입, 활동을 하다가 공산당을 소탕하는 국군과 경찰에 쫒겨 지리산에 숨어있다가 체포돼 총살 당한 것이다.

또 박지원의 삼촌과 고모는 6.25 전쟁 때 북한 편에 서서 주민들을 북한 의용군에 나가도록 정보를 인민군에 제공, 인민군이 진도 사람들을 강제로 의용군에 끌고나가도록 알선하다가 주민들의 분노를 사 북한군이 도망친 후 주민들에게 잡혀 맞아죽은 비참한 일을 당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애국지사로 둔갑해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는 일이 생긴 것이다. 친일파에서 공산당으로 변신해 총살 당한 인물이 애국자가 돼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은 도저히 이해가 될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유인물에 폭로된 내용이 사실로 드러나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그 진실이 무엇인지 추적해 보자.

박지원 씨는 이 유인물 내용을 부천(경기도) 시민신문이 호외로 발행하자 “고소하겠다”며 신문사 측에 항의하면서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소했었다. 그에 따라 부천 선거관리위원회는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지만 선거는 끝나고 말았다.

박지원의 항의에 따라 부천 시민신문사는 독자적인 취재에 나섰다. 그리고 취재를 통해 이렇게 보도했다.

“박지원 대변인의 가문이 친일을 했다는 것은 박 대변인의 출생지인 전남 진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진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친일을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일을 잘 하는 것처럼 믿게 만든 후 사실은 조선 사람들을 도왔다. 그리고 지하 독립 운동가들을 도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로당 가문이라는 주장은 일부가 사실로 밝혀졌다. 박 대변인의 아버지 박종식 씨는 광주 학생운동에 가담하여 징역 6개월을 살았으며 그 후 사회주의 운동 계열에 가담했다가 해방을 맞은 후 진도의 남로당(공산당) 조직에 가담해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학생운동 정도의 수준에 지나지 않은 것인데 1948년 경찰에 쫓기다가 사살됐다고 진도 군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일부에서는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사살됐다는 증언도 있다.

또 박 대변인의 작은 아버지 박종극 씨(1913년생)의 호적은 지난 81년과 90년 두 차례에 걸쳐 ‘멸실 우려 제재’ (다시 만들었다는 뜻)라고 기록되어 있어 2번 씩이나 다시 만든 것으로 밝혀져 의문이 남는다“고 보도 했다.

한편 칼럼자가 추적한 진상은 이런 것이다. 국가 보훈처가 지난 93년~94년에 발행한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 11권 125페이지에 박종식 씨에게 건국 포장을 주게된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해 밝혀 놓았다.

◇ 박종식(朴鍾埴) 1911. 12. 20~ 1948. 10. 23. 전남 진도 사람이다. 전남 목포 공립 상업학교(김대중 대통령이 다닌 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광주에서 대대적인 학생 시위 항쟁이 벌어져 수십명이 피검되었다는(체포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최창호 등 동교 학생들과 수차 회합하고 목포에서도 동월 (11월 같은달) 19일을 기해 동조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재실이 ‘피 감금학생 즉시 탈환’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 ‘피압박 민족 해방 만세’ 등의 구호를 쓴 붉은 목면 대기(큰 깃발) 3개와 붉은 색종이로 된 소기(적은 깃발) 약 120여 개를 만들어 배부하고 정진규 등이 등사판으로 격문 약 1,500매를 인쇄하여 서로 나누어 가짐으로써 시위 준비를 마쳤다.

드디어 19일 아침 이들은 정명 여학교 앞에 집결, 일제히 소기를 흔들고 격문을 살포하면서 “싸우자 2천만 동포여! 광주 학생을 탈환하라.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싸운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운동으로 그는 다른 주동학생 21명과 함께 피체되어(체포되어) 1930년 3월 20일 광주 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6월 21일 대구복심법원(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10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증거 자료)
◇ 판결문 (1930년 3월 20일 광주 지방법원)
◇ 판결문 (1930년 6월 21일 대구 복심법원)
◇ 광주학생 독립운동사 141-145페이지 (광주학생 독립운동 동지회 발행 1974. 11. 3.)
◇ 독립운동사 제9권 566-570 페이지 (국가 보훈처 발행)
◇ 독립운동사 사료집 제 13집 267-274 페이지 (국가 보훈처 발행)
◇ 동아일보 기사 (1930년 1월 9일자, 2월 28일자 등)
◇ 조선일보 기사 (1930년 3월 28일자)

이 같은 사실만 보면 박종식 씨는 학생시절부터 독립 애국 운동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왜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말인가? 혹시 중상모략의 거짓말이 아닐까? 하고 심층취재를 벌였다. 그 결과 유인물 속의 ‘친일파에서 남로당 변신한 가문’ 폭로 가운데 친일파를 지냈다는 부분은 잘못된 것이지만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형제가 총살당한 것은 사실이었다.


박지원 아버지, 큰아버지 경찰에 쫓기다가 사살 당해

진도에서는 옛날부터 창령 曺씨 집안과 밀양 朴씨 집안이 큰 종가를 이루어 살아왔으며 창령 조씨 집안이 섬을 지배해온 지주 집안들이었다.

그런 섬 마을에 박지원씨 아버지 박종식 씨가 목포 공립상업학교에 시험을 쳐서 입학하였다는 것은 섬 전체의 자랑이었다. 진도 섬마을에서 박지원의 아버지 박종식씨가 육지 목포 상업학교에 진학한 것은 대단한 화제거리였으며 “진도 천재라는 말까지 있었다”고 진도 노인들은 증언했다.

그러나 3학년 광주 학생만세 운동의 목포 학생 데모주역으로 체포되어 10개월 동안 징역살이를 하는 바람에 졸업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상업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에게 잘 보여 진도에서 생산되는 목화와 쌀 생산품을 사서 일본으로 가져가는 일본 무역회사의 현장 책임자로 일하면서 주민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또 일본인들에게 신임을 얻어 강제징용이나 군대에 소집당하지 않는 신분 보장도 맡게 되었다. 박종식은 그 점을 이용, 상해 독립운동가들과 접선했으며 자금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박동식 씨가 연결하며 일하던 독립 운동가들이 백범 김구 선생이 이끄는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이 아니고 좌익 사상을 가진 공산당 계열 운동가들 이었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8.15 해방이 된 후 공산당 조직에 몸을 던지게 됐다고 진도의 원로들은 증언했다.

박지원 씨의 집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박지원의 고종 사촌형이다. 아버지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와 고모까지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총살당하거나 마을 주민들로부터 돌과 몽둥이로 맞아 죽은 후 고아나 다름없는 어린 박지원 형제를 돌보아 주며 키운 사람이 고종 사촌형 조우승 박사이다.(曺祐承 : 한의학 박사, 조우승 한의원 원장 - 서울 방배동 지하철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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